혁신기업의 딜레마

제일 좋은 고객의 말을 제일 잘 들은 회사가, 바로 그 말 때문에 뒤처지는 함정이에요.

정의 앞서가던 회사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잘해서 밀려나는 구조예요. 좋은 고객의 요구를 챙기고 이익이 큰 쪽에 돈을 붙이는 판단이, 작고 값싼 새 기술을 계속 뒤로 미루게 만들어요. 그 기술이 쓸 만해질 무렵에는 따라잡을 시간이 남아 있지 않고요.

액정 화면을 처음 보여 준 회사는 어디로 갔을까요

얇고 가벼운 액정 화면을 세상에 처음 내보인 곳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크게 팔던 미국 전자회사 RCA의 연구소였어요. 그런데 그 화면을 물건으로 만들어 판 것은 그 회사가 아니었어요.

먼저 팔린 것도 텔레비전이 아니었어요. 손바닥만 한 계산기와 손목시계였고, 일본의 샤프와 세이코가 만들었어요. 초기 액정은 작고 흐리고 느려서 텔레비전에 쓸 물건이 못 됐거든요. 대신 전기를 거의 안 먹어서 건전지로 돌아가는 물건에 잘 맞았어요.

갈린 자리는 브라운관 사업을 가졌느냐가 아니었어요. 샤프도 일본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양산하고 뒤에는 컬러 브라운관 TV까지 팔던 회사였거든요. 갈린 것은 그 회사 안에서 액정에 돈과 사람이 붙었느냐였어요. 브라운관이 큰 매출을 내주던 회사에서 액정이 겨눈 시장은 너무 작고 이익도 얇았어요. 그래서 순번이 계속 뒤로 밀렸죠. 계산기가 주력이던 샤프에서는 그 작은 시장이 바로 자기 시장이었고요.

액정은 계산기에서 시계로, 시계에서 작은 컬러 화면으로, 노트북에서 모니터로 몸집을 키웠어요. 그러고는 마지막에 텔레비전 자리까지 올라섰어요.

액정 화면이 작은 물건에서 시작해 계단을 밟고 텔레비전까지 올라간 경로 처음 보여 준 회사는 여기 없음 계산기 손목시계 노트북 모니터 텔레비전

회의실에서 매번 지는 안건

왜 앞선 회사는 자기가 연 문으로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게을러서도 아니고 기술을 몰라서도 아니에요. 회사 안에서 돈과 사람을 어디에 붙일지 정하는 자리에서 매번 밀렸기 때문이에요.

새 기술은 처음에 성능이 낮아요. 그러면 지금 돈을 가장 많이 내주는 고객이 '우리한테는 쓸모없다'고 말해요. 그래서 그 고객을 챙기는 제안이 회의에서 이겨요. 새 기술 쪽 제안은 시장이 작고 남는 이익도 얇아서 순번이 계속 뒤로 밀려요.

여기까지는 이상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 매출을 만들어 주는 고객의 말을 듣는 것은 가장 교과서적인 판단이니까요.

문제는 밀어 두는 동안 그 기술의 성능이 자기 시장에서 꾸준히 올라간다는 데 있어요. 그러다 어느 날 기존 고객이 요구하던 수준까지 올라와요. 그때 뛰어들려고 보면 상대는 값을 낮추는 경험을 이미 여러 해치 쌓아 둔 뒤예요.

기존 고객이 요구하는 수준과 새 기술의 성능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 주는 그래프 성능 시간 기존 고객이 요구하는 수준 여기서 판이 뒤집힘 쓸모없다고 말함 새 기술의 성능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파괴적 혁신과 같은 말이 아니에요

이 말은 파괴적 혁신과 자주 섞여요. 둘은 같은 장면을 서로 다른 쪽에서 보는 말이에요. 파괴적 혁신은 밑에서 올라오는 기술과 제품 쪽을 가리키고, 혁신기업의 딜레마는 그 앞에서 앞선 회사가 옳게 판단하고도 밀리는 구조를 가리켜요.

그래서 이 구조를 딜레마라고 불러요. 지금 고객의 말을 들으면 새 기술에 밀리고, 듣지 않으면 오늘의 매출이 흔들려요. 어느 쪽을 골라도 값을 치러야 하는 자리예요.

다만 앞선 회사가 밀려나는 모든 장면을 이 구조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값이 무너진 해에 전년도 이익이 적자라 투자할 돈 자체가 없었던 회사도 있고, 제품 규격을 한 단계씩 올리다가 시장이 중간 단계를 건너뛰어 어긋난 경우도 있어요. 회의에서 밀린 게 아니라 장부에서 갈린 자리죠.

그러니 이 개념은 앞일을 맞히는 예언이 아니라 점검표에 가까워요. 제일 잘 팔리는 우리 제품의 고객이 '그건 우리한텐 필요 없다'고 말하는 기술이 있는지 살피게 해요. 그리고 그 기술이 다른 시장에서 얼마나 빨리 좋아지는지를 함께 보게 해 줘요.

🤔 흔한 오해

✕ 오해

혁신기업의 딜레마는 큰 회사가 게으르고 관료적이어서 새 기술을 놓친다는 뜻이다.

✓ 사실

오히려 잘 관리되는 회사에서 잘 나타나요. 좋은 고객을 챙기고 이익이 큰 쪽에 돈을 붙이는 판단이 그대로 작동한 결과거든요.

✕ 오해

앞선 회사는 새 기술을 몰라서 밀려난다.

✓ 사실

밀려난 회사가 그 기술을 먼저 만들어 보인 경우도 있어요. 기술을 아는 것과 그 기술에 돈을 붙일 명분을 회사 안에서 얻는 것은 다른 일이에요.

🧺 일상에서 만나요

1 브라운관을 팔던 회사에게 초기 액정 화면은 화질이 떨어지는 물건이었고, 그래서 회사 안에서 뒤로 밀렸어요.
2 성능 좋은 제품에 익숙한 단골이 '그건 우리한테 부족하다'고 말해서, 값싼 신제품 개발을 다음 해로 미루는 회의 장면이에요.
💡 그러니까 한마디로

잘하던 회사가 못해서가 아니라 지금 고객의 말을 잘 들었기 때문에 밑에서 올라오는 기술에 밀려나는 구조예요.